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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피아 성당 모자이크.webp

ART HISTORY

​<프로젝터 2022>, 그 속의 미술사.

Byzantine art

비잔틴 미술은 4세기 경부터

1453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에 이르는

동로마 제국의 예술품을 가리키는 용어다.​

중세 유럽(476~1453),

동고트족과 이탈리아 비잔티움 제국이

패권다툼을 하는 과정에서 문화 접변이 일어난다.

이러한 문화접변의 결과로 중세시대만의

새로운 미술 양식이 탄생하는데

이 중세유럽 미술을 대표하는 미술 양식이

바로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 미술이다.

중세 유럽에서 미술작품은, 예술을 추구하기 보다는

대중에게 종교를 전파하기 위한 수단적인 매체로서,

종교적인 특색이 진하게 나타나는

신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비잔틴 미술에서는 예수를

전지전능한 지배자 또는 설교자로 묘사하는데,

예수와 같이 그림의 중심축이 되는 인물을

더욱 도드라지게 부각시키기 위해

주연이 되는 인물을 크게, 조연들은 작게 묘사하는

비례적이지 않고, 비현실적인 원근법 구도가 사용되었다.


이에 따라 중세 미술작품들은

대게 예수 또는 성모자를 중심으로 하는

대구도가 주를 이룬다.

<성 삼위일체의 성모 마에스타>

<성 소피아 성당의 모자이크>, 이스탄불

Mosaic

​모자이크는 비잔틴 미술 기법 중 하나로,

작은 단편을 모아

일정한 형상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비잔틴 미술에서의 모자이크 기법은

반짝이는 유리 조각을 사용하였고,

반짝이는 유리의 화려한 색채와

금색의 사용으로 그려진 화려한 색채는

현세를 초월하는

비물질적 영정세계의 가시화를 나타내며,

천국과 같은 황홀한 분위기를 연출시킨다. 


모자이크는 성당의 건축물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평면적 구도가 특징적이며

주로 성수, 사자, 기하학 무늬 등을 표현했다.

alphonse mucha

모자이크 기법의 디자인적 특성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현대 예술가는 알폰스 무하이다.


알폰스 무하는

당시의 원색적인 포스터들과 달리,

파스텔 톤의 투명한 색채, 명암과

비잔틴식 모자이크로 이루어진 배경을 그려

작품에 중세풍의 화려함을 녹여냈다.


대표적으로 무하의 작품 네 가지 보석시리즈

(순서대로 토파즈, 루비, 자수정,에메랄드)

의 배경에서 비잔틴 양식의

고유의 기하학적 패턴이 잘 드러난다.

Renaissance

‘르네상스(Renaissance)’의 원 의미는 ‘재생’으로,

이는 고전적인 유럽 미술 양식의 재발견이며,

유럽 문화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의미이다. 


로마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엄격한 비례, 원근법, 소실점,

삼각형 구도, 해부학에 대한 배경지식을

특징으로 하는 르네상스 양식이 시작되었는데,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가톨릭 신화에 등장하는 하나의 장면을

화려하고 밝고 부드러운 색감으로 묘사해냈다.


플랑드르 지방을 중심으로 전파된 르네상스는

15세기에 이르러 북유럽에도 자리잡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와는 조금 달랐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감은 고전기 유물이었으나,

북유럽에는 고전기 유물이 발견되는 빈도가 적어

그리스의 이상적 비례보다는 자연물에 집중하여

물체를 최대한 세부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후 북유럽은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이탈리아와 달리 종교적 신념을 표현하는 작품보다

평민이나 부자와 같은

일상적 이야기를 주제로 한 작품이 늘었다.

즉, 민화적 요소가 더욱 강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비너스의 탄생> - 산드로 보티첼리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 작품

<농부들의 결혼식> - 피터르 브뤼헐 더 아우더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 작품

Chinese Traditional painting

​중국의 회화, 절파 vs 오문파

<방연문귀산수도> 대진

- 절파의 대표적 작품

절파는 명나라 시대 중국 북부를 중심으로

활동한 예술가들을 통칭한다.

대표적인 화가는 대진이다.

주원장이 원을 멸망시킨 후

원대 문화의 이원 정책을 채택하지 않았고,

따라서 명 초기 화가들은 여백의 미를 강조하던

원대의 화풍을 배제하고

남송 원체의 심미적 정취를 흡수했다.

 

사실 절파에 속한 화가들은

특별히 새로운 화풍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남송 시대의 화풍을 그대로 따라

대형화나 장식적인 그림들만을 주로 그렸기에

이름처럼 하나의 파를 이루었다 할 수는 없다.

 

절파의 그림들은 대부분 보수적이고,

의례적이며 학구적인 풍을 띠고 있다.

명나라 시대에 송 시대의 화풍을 

되살리려 하였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남송의 원체는

근엄하고 틀에 얽매인 데 반해,

절파의 화풍은 더욱 자유분방하고

간결한 터치와 풍부한 먹의 연출,

동적인 선이 어우러져 새로운 분위기를 더했다.

<여산고도> 심주

- 오문파의 대표적 작품

명대 중기에 들어서면서 절파의 자리를

​오문파가 새롭게 대체하기 시작했다.

원대 이래 강남 쑤저우 일대는

사대부 예술이 뿌리를 내리고 번성한 지역이라,

남송의 화풍보다는 원나라의 화풍을 계승했다.

그러다 명 중기에,

방직업 중심이던 쑤저우가 상공업이 발달하며

강남 일대가 부유한 도시로 자리잡고,

이는 문화의 발전으로 이어져, 문인들이 모여

​원대 회화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오문파가 등장하게 된다.

오문파는 주로 원대 회화 전통을 발전시켰다.

대표 화가인 심주는 기본적으로

원나라의 왕몽의 화풍을 따르지만

송나라와 원나라 문인 화가들의 화풍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온화하고 수려한 분위기를 덧씌워

개성을 선보인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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